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(문단 편집) ==== 세무 정책의 문제점 ==== 쉴리 재상의 경제 정책도 통상적으로 상상하는 [[명재상]]이 행할 정책과는 거리가 멀었다. 물론, 쉴리의 세무 정책은 놀랍도록 효율적이었다. 1610년에 왕이 서거할 무렵, 바스티유의 국고에 1,100만 리브르에 육박하는 돈이 보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. 이 거액의 돈은 도시계획, 인프라, 매립공사, 궁전을 건설하거나, 북아메리카 퀘벡 지방 식민지화에 쓰일 선박을 설계하는 데 쓰였다. 하지만, 쉴리의 정책의 핵심은 직접세를 경감하고 간접세를 가중하는 것이었는데, 이때 창설한 간접세 중 하나가 바로 [[매관매직]]이었다. 물론, 공직 매매는 쉴리의 발명품이 아니라, 선대 왕조부터 행해지고 있었다. 하지만 쉴리는 왕의 인가를 받아 이 행위를 관습화하고 체계화했다. 관직을 그저 파는 것이 아니라, 관직을 판 뒤 세습권 또한 간접적으로 판매했는데, 이것이 바로 '''폴렛'''(폴레트)이었다. 도입할 무렵 이런 즉각적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지만, 18세기부터 왕에 대한 충성심과 업무처리 능력이 뛰어나야 할 고위 관료[* 특히 사법부]들이 가문에 의존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. 이런 관점에서, 루이 15세, 루이 16세의 몰락은 부분적으로나마 쉴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. 물론 쉴리만의 책임은 아니다. 차라리 쉴리의 정책대로 [[매관매직]]만을 꿋꿋이 밀고 나갔다면 [[프랑스 대혁명]]이 일어나는 시간은 조금 더 뒤로 미뤄졌을 가능성도 있는데,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에 매관매직으로 작위나 직위를 산 [[부르주아]]들, 즉 법복귀족들이 자신들이 얻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부르주아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이런저런 조치를 취해서 이른바 [[사다리 걷어차기]]를 시전한 것이 큰 문제였다. 매관매직이 문제가 많았어도, 그래도 매관매직은 부르주아들에게 귀족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고, 부르주아들이 [[프랑스 대혁명]]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을 보면 비록 [[앙시앵 레짐]]이 문제가 많아 언젠가는 한 번 터질 일이었겠지만[* 법복귀족들의 횡포는 대검귀족보다 더하면 더했지, 결코 덜하진 않았다. 예시로 이 시기에 이르면 봉건제적 관습들이 사문화되어 있었는데, 경제적 압박 등 여러 요소로 이런 관습들을 캐내어 부활시켜 평민들의 증오를 미치도록 받았다. 농민들이 [[프랑스 대혁명]] 당시 귀족들을 학살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.] 적어도 부르주아들에게 계속 매관매직을 통한 기회라도 주었다면, 폭발하는 시간만은 늦췄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